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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 대한 추억
국민학교 저학년 무렵 동네 서당(사실 서당이라기 보다 한문을 많이 알던 동네 어른이 아이들에게 그냥 한자를 가르치는 집이었다)을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내게 한자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글자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몇몇 글자는 깨우쳤지만 시간이 갈수록 아무 의미 없이 진도만 나갔다. 나는 한자 옆에 작은 글씨로 쓰여진 한글을 눈치껏 미리 보며 마치 진도 나가는대로 따라잡는양 하였다. 결국 훈장님은 나를 제법 많은 한자를 깨친 것으로 알았고, 그런 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얼마나 즐거워하시던지... 그 때부터 아버지는 먼 집안 사람 등의 방문이 있으면 나를 불러들여 공부한 한자를 읽어보게 하셨다. 물론 나는 당연히 한자는 모르면서 그 옆의 한글 토씨를 읽었고... 방문객의 감탄과 아버지의 자랑스러움을 보며, 기..
2023.05.24 -
사형에 관한 추억1
형사합의부장을 끝으로 변호사 업무를 시작하였다. 교도소 접견을 갔더니, 교도관이 어느 형확정자가 접견을 꼭 희망한단다. 그래서 별 생각없이 만나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사형 확정자, 그것도 내가 판사 마지막 무렵 선고하고 온 확정자였다. 그래, 항소심에서도 사형을 못 면하였느냐고 하니, 아예 항소를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유를 물어보자, 판사님의 판단이 맞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낭패감! 왜 나를 만나보려 하였나고 하니, 그저 가까이서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었다며, 편안한 웃음을 웃고 있다. 후임자에 미루는 것은 미안한 일로 여겨져 굳이 서둘러 선고를 하였는데, 이렇게 만나보니, 내 판단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23.05.24 -
사형에 관한 추억2
이미 강도살인으로, 무기징역이 확정된 자였다. 그런데 추가 기소 죄명 역시 강도살인. 그 내용 또한 매우 흉칙하여, 도박판에서 돈을 잃었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유인하여 약을 태운 음료수를 먹이고, 도끼로 머리를 ... 그러면서 연신 탄원서를 낸다. 목숨이란게 왜 이리 모진 것인지, 자신은 죽어 마땅하고, 당연히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데, 도저히 그러하지 못하니, 판사님이 꼭 사형선고를 내려달란다. 합의부원 3명은 이 사건 심리를 시작할 무렵 수시로 사형제도가 과연 정당한지 등 철학적이고 보다 근원적인 의견을 주고받았다. 모두 사형제도는 반대! 드디어 위 사건 합의에 이르러, 서로 토론없이 각자 의견을 종이에 적어 내고, 그 결과에 무조건 따르기로 하였다. 결과는 각자의 인생관과 무관하게, 법률가의 입장..
2023.05.24 -
사형에 관한 추억3
그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 검사의 항소. 그는 일부 부인하지만 적어도 5명 이상의 사람을 죽였다. 피해자들은 모두 노인네. 자신의 감호소 시절 받은 부당한 대우를 세상에 알리려니 세상이 주목하는 일을 저질러야 된다고 판단했단다. 그렇지만 먼길 가야하는 젊은 사람을 희생시킬 수는 없어 얼마남지 않은 노인들을 선택하였단다. 거의 대부분 태워죽이는 방식. 아무리 동기를 참작해도 방법과 피해자 수를 고려하면 사형이 정답으로 보였다. 1심 판사를 원망하며, 결국 검사 항소를 받아들였다. 1심은 국선변호사이었는데, 항소심은 사선. 그래서 항소심 변호사 사무실은 난리가 났다는 후문담을 들었다. 그로부터 상당한 기간이 지난 어느 날 신문에 사형집행되었다는 기사가 났다. 바로 그날 하필이면 서울 출장이라 서울 법..
2023.05.24 -
아버지에 대한 추억2
언제쯤인지 기억에 없다. 국민학교 고학년? 중학생? 아마 초여름 정도? 논에 가서 일을 하던 중 비가 내렸다. 일을 힘들어 하던 중 비가 내리니 얼마나 좋던지. 얼른 일을 그만두고 서둘러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 '일을 다하고 왔나'. 나, '아니오, 비가 와서...'. 아버지, "살가죽에 빗물이 들어가드나?"
2023.05.24 -
아버지에 대한 추억3
아버지는 나를 꾸중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당연히 체벌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딱 한번,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화를 내시면서 막대기를 들고 나를 때리려고 하셨고, 나는 맞으면 죽을 것 같아 도망간 적이 있었다. 집 마당에서 타작을 하는 중에 국민학교 저학년인 나는 주위로 흩어진 이삭을 줍는 일이 맡겨졌다. 얼마정도 지나 일이 지겨워졌고, 줍는 대신 발로 슬쩍 밟아 뭉개버렸다. 이를 보신 아버지는 '곡식 수확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짓이냐'며 바로 막대기를 드셨다. 이후 나는 한알의 쌀알도 식단에 놓이기까지 얼마나 여러 힘든 노고를 거쳐 이르렀는지를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2023.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