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26. 15:34ㆍ취미생활
2015년 뉴욕마라톤 참가기
대구법원조정센터 상임조정위원 이선우
1. 이야기
어쩌다가 달리기를 시작하고, 그렇고 그렇게 취미삼아 적당히 달리면서 운동깨나 하는 양 우쭐거리기도 했다.
그 무렵 고등학교 동문 마라톤회가 조직되었다. 줄줄이 전설이다. 꿈의 3시간 이내 완주는 물론, 100회 완주, 그리고 울트라... 심지어 9년 위 선배님은 사하라 사막 마라톤에 같이 가자고 꼬드기신다. 나에겐 그저 꿈같은, 아니 꿈도 꾸지 못할 수준이다. 흉내조차 낼 수 없다.
그러니 이러한 전설들과 같이 하는 모임은 은근한 스트레스다. 그러던 차에 전설과는 거리가 먼 2년 선배님들이 2012년 회갑을 기념하여 상해마라톤에 참가하신단다. 달리기에 이야기를 입힌다! 그래, 우리 동기는 2년 후 회갑을 기념하여 조금 더 멋있고 폼 나는 이야기를 만들어 볼까?
2. 좌절
전설에 버금가는 이야기를 만들자면, 적어도 세계 4대 메이저대회의 하나라는 뉴욕마라톤에 참가하기로 의견이 모아진다.
그러나 뉴욕마라톤은 참가비가 장난이 아니다. 마라톤 참가비만 525불로 60만원! 처음엔 뭔가 잘못된 정보라고 오인하였다. 거듭 확인하니, 뉴욕마라톤협회는 과거 참가 인원을 고려하여 국가별로 참가인원을 할당하고, 미리 정해 준 에이전트를 통하여 참가를 보장하는 대신 통상의 참가 절차에 따른 참가비 보다 300불을 더 받는다. 즉, 참가비 225불로 참가하자면 약 5:1 경쟁의 추첨을 통과해야 한단다. 이 경쟁률은 해마다 차이가 있지만 차츰 높아진다고 한다. 다만 참가비 225불에 확실한 참가보장을 받자면 뉴욕마라톤협회 주관의 소규모 마라톤 참석 9회와 자원봉사 1회의 자격요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한국에 거주하는 우리로선 불가능한 요건이다.
결국 참가를 확실히 하자면 525불 참가비를 부담할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자본주의 논리에 따른다지만 너무 폭리를 취하는 뉴욕마라톤에 그렇게 많은 참가비를 내고 갈 수야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러던 차에 우리 중에 가장 건강하다던 친구가 원인불명으로 갑자기 쓰러진 후 영영 일어나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자연스레 회갑기념 마라톤은 흐지부지 없었던 것으로 되고, 내 마음에 달리기가 차지하는 비중도 낮아만 간다.
3. 내 친구 영
대학생 시절 만난 내 친구 영은 그야말로 부랄 두쪽만 차고 미국 가서 눌러 붙어 악착같이 살아가는 친구다. 한참 세월이 지나서야 불법체류자 신세를 벗어나 한국에 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너무 고생을 하였음인지 혈압, 당뇨 등 각종 성인병을 걱정하는 처지이다. 그즈음 나는 한창 마라톤 예찬론자이던 때라 친구를 꼬드겼다.
이후 친구는 마라톤에 서서히 빠져들었고 급기야 미국 50주 마라톤 참가 동호회에 가입하여 모두 뛰어보았단다. 진작 자기가 한국에 와서 뛰거나 아니면 내가 미국 가서 뛰더라도 한번쯤 동반주를 희망하였는데, 위와 같이 우리 동기의 뉴욕마라톤 참가가 무산되자 꽤나 아쉬워하였다. 그러면서 나 혼자라도 뉴욕에 와서 동반주를 하잔다.
이미 마라톤은 내 마음에서 시들해졌는데, 특히 풀코스는 주위 사람들이 말려 사실상 그만둔 셈인데, 어쩐다? 좋다, 나 스스로 회갑기념으로 치부하고 정말 이번 한번만 더 뛰자. 회갑기념이라면 뉴욕 정도는 가줘야 예의가 아니겠나...
4. 배수진
막상 뉴욕까지 가서 풀코스를 뛰려니 스멀스멀 생겨나는 두려움. 마음을 돌려? 아니야 그대로 가는 거야.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한다.
이래선 안 되겠다. 마음을 다잡아야겠다. 그래서 친구 영에게 일단 참가하기로 마음먹었다 통보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2015년 뉴욕마라톤에 참가한다고 떠들고 다닌다. 얼마쯤 지나자 나를 아는 주위 사람들 모두가 뉴욕마라톤 참가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이젠 가지 않으면 쪽팔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드디어 여행사에 참가신청도 하고 계약금도 보낸다. 자, 어쩔 수 없다. 뉴욕까지 가서 완주도 못하는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연습, 연습뿐이다.
5. 후회
딱 한번 중도포기를 하였을 뿐, 그래도 완주 경력이 두자리 수다. 비록 풀코스 완주한 지 2년 이상 지났지만, 그리고 시차문제도 있겠지만 설마 완주를 못하겠나. 여름더위로 연습이 힘들 때는 이런 건방진 생각으로 위로한다. 결과적으로 준비 훈련은 자꾸 부실해진다. 이래저래 8월 중순까지 주당 30km 채우기도 어렵다.
내 마음 깊은 곳에 불안감이 엄습하고야 주당 50-60km를 소화한다. 9월 중순까지 그럭저럭 연습하고, 32km 장거리도 뛰고 나니 약간 자신이 생긴다. 그런데 정작 9. 20. 달서웃는얼굴 마라톤대회 하프코스에 참가하여 후반 5km를 힘들여 뛰고 나니, 도대체 내가 왜 뉴욕까지 가서 풀코스를 뛴다고 했는지 후회막심이다.
그러나 연습량을 많이 늘리긴 무리로 느껴져 종전보다 약간 강도를 높이는데 그치다 10. 11. 경주 동아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으로 막바지 훈련을 대신하였다. 힘은 들었지만 완주를 하고 나니 조그만 언덕 하나를 넘은 기분이다. 이젠 서서히 훈련량을 줄이며, 내 몸을 11. 1.에 맞추어 가면 된다!
6. 복병
마라톤에 참가하여 욕을 보지 않으려면 몸 상태 유지가 매우 중요하다. 몸 관리 또한 실력의 일부다.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기도를 하는 심정으로 매일을 보냈지만 결국 정신상태 불량으로 출국 닷새를 앞두고 감기가 시작된다. 일찍이 감기약은 복용 않던 터이지만, 치료해도 1주일 넘기기 일쑤이니 감기란 복병을 안고 달릴 수밖에 없다.
나는 잠자리를 심하게 가리는 편이다. 여기에 시차까지 극복하여야 한다. 미리 시차 적응을 한다고 출국 이틀 전에는 밤 11시에 나가 새벽1시까지 걷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막상 비행기에 오르니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준비한 수면제 반알에도 별 소식이 없다. 약한가 생각하여 다시 한알 복용! 그런데 그게 그만 수면제 과다복용의 결과로 나타났다. 일정 시간 지나 거의 의식을 잃고 말았는데, 눈이 풀어지고 구토를 하는 등 난리를 쳤다는 아내의 말을 나중에 들었지만 그런 기억조차 전혀 없다.
이 때문에 수면제 부작용에 대한 우려로 마라톤전 이틀 밤을 수면제 없이 버티었다. 결과적으로 마라톤 출발점에 섰을 때는 이전 3일간 잠잔 시간이 합하여 겨우 8시간 정도이다.
7. 환희
뉴욕마라톤은 참가인원만 5만명인지라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출발 3시간 전에 현장에 도착하는 것이 안전하다. 그러니 4시간 이상 달려야 하는 나로서는 아침밥을 먹은 후 점심은 굶고 뛰게 된다. 여행사에서 호텔로 배달하여 준 찹쌀밥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천천히 꾸역꾸역 쑤셔넣는다.
드디어 한국에서 함께 간 일행들과 호텔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버스에 올라 출발지 스테이튼 섬으로 간다. 출발지 부근을 3시간 이상 전에 도착하였음에도 차량이 엄청나게 밀려 30분 이상 빌빌 기고도 여전히 현장 접근이 어렵다. 우리 일행은 버스 도착지점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내려서 현장으로 간다. 다행히 날씨는 그렇게 춥지 않다.
현장 도착하니 검문절차를 비행기 탑승 때만큼 철저히 한다. 지난 보스톤마라톤 대회의 테러 여파란다. 출발지점은 엄청난 인파가 북적인다. 내 출발구역을 찾아가는데 거의 20분 이상 걸린다. 곳곳 잔디밭에 담요를 두르고 앉아있거나 주최측이 시설한 대형 비닐하우스 안에 누워있는 사람,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거나 참가자들 모두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각종 물품이나 식음료를 챙기는 사람들.
나는 혹시 몸에 이상 반응이 올까 염려하여 한국에서 가져간 양갱 하나와 친구 영이 준비하여 온 삶은 달걀 1개를 먹고 물 한병 마시는 것으로 출발준비를 마감하였다.
드디어 내 출발시간 10시 40분이 가까워지고 출발선상으로 이동한다. 여가수가 나와 미국국가를 부르고 간단한 세리모니가 있은 후 출발! 입고 있던 헌옷을 버리고 출발대열에 합류하며, 마음속으로 4시간 30분 정도를 목표 희망시간으로 정한다. 친구 영과 동반하며 사진도 부지런히 찍고 즐기며 달리기로 한다.
출발하자 곧장 베라자노 다리를 오르게 된다. 약간의 오르막이지만 평소 범물동 언덕길을 훈련한 덕분인지 거의 평지로 느껴진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밋밋하게 그냥 통과할 수야 없지. 다리 중간지점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다리를 건너니 브루클린 구역이다.
브루클린 도로에는 엄청난 시민들이 몰려 응원의 함성을 보낸다. 그냥 박수와 응원의 소리를 지르기도 하지만 한 300여명이 조직적으로 율동과 함께 응원을 하기도 한다. 곳곳에 각종 악기를 연주하며 힘을 보태는가 하면, 어린아이들은 하이파이브로 기를 전달하고자 한다. 내 생애 처음 맛본 환영인파에 저절로 흥분이 되어 연도시민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손을 흔들어 감사의 표시를 보낸다. 시민들도 박수와 함성을 보내며 코리아!를 외쳐 주기도 한다.
이런 흥분 상태로 달리다 보니 언제 20km 지점을 통과하였는지, 그리고 브루클린을 지나 퀸스 구역으로 들어왔는지 조차 몰랐다. 그런데 퀸스에는 연도 시민들이 박수를 보내기는 하나 인원도 적지만 열기도 종전에 미치지 못한다. 아마도 열정 보다 이성에 중점을 두는 주민들인가 보다. 나도 계속하여 손을 흔들고 하이파이브를 하느라 많은 힘을 소요하였는지 더 이상 그러기엔 무리인 듯하다. 슬그머니 도로 가운데로 달리며 자연스레 관중과 거리를 두고 달린다.
약 25km 지점에 있는 퀸스보로 다리를 건너 맨하탄에 들어서니 이제와는 다른 엄청난 인파가 소리를 지르며 응원을 한다. 맨하탄의 1번 도로를 따라 북쪽 방향으로 직선으로 약 6km에 이르는 대로 연변에는 세계 곳곳 나라들의 사람들이 자국민을 기다리며 응원 경쟁을 하고 있다. 뉴욕한인마라톤회 관계자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달려가 기념촬영을 하고 콜라 한잔에 소금 약간을 공급받아 다시 힘을 얻는다.
31km를 조금 지나 잠시 브롱스 구역을 넘어가 3km 정도 달리고 다시 맨하탄 5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며 35km 지점에 이를 무렵 오른쪽 다리가 약간 굳는 느낌이 든다. 잠도 부족한데다 오늘 흥분하여 일정 속도로 달리지 못하고 페이스를 잃은 탓이다. 속도를 줄여 오로지 걷지 않고 완주하기를 목표로 한다. 38km 지점인가에 뉴욕한인회에서 나와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고 기념촬영도 한다. 그들로부터 소형태극기를 받아들고 뛰니 새로 힘이 난다.
이제 남은 거리는 거의 센트럴파크 내의 가을 단풍이 고즈넉한 도로이다. 상쾌한 기분에 심호흡과 함께 주위 단풍을 구경하며 무념무상으로 달리다보니 어느새 결승점이다. 결승선에는 프로사진사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친구 영과 함께 좀 더 멋있는 사진을 만들고자 속도를 조절하여 다른 참가자들의 방해 없이 촬영공간을 만들면서 결승점을 통과한다.
결승점을 지나자마자 여러 줄로 겹겹이 서있는 자원봉사자들이 추위를 막을 수 있도록 바로 비닐로 참가자 몸을 일일이 감싸준다. 메달도 직접 목에 걸어주고 기념촬영도 하여준다. 이렇게 메달을 걸고 비닐로 몸을 감싼 채 약 20분을 걸어 센트럴파크를 나와 우리 일행들과의 약속장소인 도로로 나오니 내게 콩그레츄레이션 하면서 축하를 건네는 시민들도 있다. 나도 회갑을 멋지게 한 내게 콩그레츄레이션!
8. 첨언
2015 뉴욕마라톤 참가자는 약 5만명. 그래서 출발지를 3곳으로 나누고, 출발지마다 다시 출발시간을 4개 단위로 구분하여 약 20-25분 간격을 둔다. 각 단위로 출발시킬 때도 여러 출발구역을 나누어 한꺼번에 참가자가 몰리지 않도록 한다. 이 많은 인원이 약 2시간에 걸쳐 아무런 혼란 없이 출발하는 모습이라니...
뉴욕마라톤은 대회관리자, 경찰, 의료진 등 공식적인 관계자 이외에도 자원봉사자가 약 1만 천명이 된다고 한다. 출발지점이나 주로는 물론 도착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참가자에도 불구하고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가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자원봉사자 덕분으로 보인다. 너무 비싼 참가비가 아닌가라는 생각은 이러한 대접을 받고 보니 싹 가신다.
사실 한국 마라톤 풀코스 참가비는 가장 비싸다고 해도 5만원이다. 이에 비하면 뉴욕마라톤은 우리 같이 국가별 할당된 인원의 참가비는 말할 것도 없고 통상 참가비조차 매우 고액이다. 공식 후원자와 광고로 인한 수익금 또한 엄청나다고 한다. 그런데 뉴욕마라톤협회는 대회 주최로 인한 수익금 대부분을 뉴욕 시민들을 위하여 기부를 한단다. 이렇게 기부를 하기도 하지만 참가자들과 그 가족들이 뉴욕에 뿌리고 가는 교통, 숙박비 등 제반경비도 매우 크다. 이러한 경제적인 효과를 잘 알고 있기에 뉴욕시민 대부분은 대회당일 하루 기꺼이 교통통제를 감수한단다. 그리고 이제는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아예 이 날을 시민들의 축제로 즐긴단다. 주최측은 300여만의 관중이라고 하지만 느낌으론 그 이상이 응원을 한 것 같다. 참으로 부러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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