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9. 14:39ㆍ카테고리 없음
고대와 현대의 조화, 동양과 서양의 만남,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존! 지리적, 역사적으로, 그리고 종교적, 문화적으로 동서양의 문명이 교차하면서, 터키는 우리에게 돌궐족의 후예들이 건국한 친숙한 나라이기도 하지만 그리스, 로마에 뿌리를 두고 이슬람에 바탕을 둔 대제국 오스만 터키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낯선 나라이기도 하다.
이런 공존, 조화의 결정체가 바로 이스탄불! 일찌기 동서교역의 중심지로 활발한 상업활동에 터잡아 번영을 누렸던, 그리스, 로마의 도시국가 비잔티움(기원전 7세기 경 비자스 장군이 도시국가를 건설함으로써 그 이름을 따 비잔티움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30년경 로마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콘스탄티노풀로 이름이 바뀌면서 1000년 왕국 동로마제국의 수도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러다가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에 의하여 함락되면서 (동)로마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이제는 오스만의 수도로서 이스탄불로 불리며 이슬람 문명의 중심지로 변모하였다. 현재의 터키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는 앙카라로 옮겨졌지만 여전히 역사적, 지리적 중요성으로 터키 제1의 도시로서 세계인의 마음에 영원한 수도로 남아있다.
에페소 관광을 마치고 이즈미르(카야이즈미르 호텔)에서 숙박한 후 7. 26. 비행기로 1시간 날아 이스탄불에 들어오니 역시 후끈한 열기가 인사를 한다.
먼저 유람선을 타고 보스포러스 해협을 한바퀴 도는데, 이스탄불의 유럽과 아시아 지역을 멀리서이기는 하나 한눈에 보게 되니 바로 여기가 그 경계구나 하면서 감회에 젖게 된다. 이스탄불 도시에 무수히 솟아있는 첨탑은 과연 이 나라 인구의 98%가 이슬람교도라는게 실감난다. 항구에 정박한 거대한 4대의 크루즈선은 이스탄불이 차지하는 관광의 무게를 말해주고, 바다 연안에 인공섬으로 만들어진 수영장 휴게시설은 이 나라 국민들의 빈부격차, 다시 말해 부자의 경우 어마어마한 부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연결하는 2개의 거대한 다리도 장관이고, 해변가를 중심으로 군사, 학교 시설, 궁전 등이 늘어져 있어 이스탄불의 성장 원천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유람선을 탄 후, 3세기 경 전차경기장으로 만들어진 히포드럼 광장에서 들은 3개의 첨탑에 얽힌 이야기(이집트 신전과 그리스 신전에 있던 것을 가져 왔고, 하나는 독일 황제로부터 선사를 받았다)는 이스탄불의 화려한 시절을 말해주지만, 한편으로는 현재 땅속에 묻혀버린 경기장은 이슬람으로 쇠락한 역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다음에 찾은 성소피아성당은 이스탄불 관광의 핵심이다. 콘스탄티누스2세가 세운 성당이 화재로 소실되고, 유스티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537년 재건된 성당은 예루살렘의 성전보다 더 아름다운 성당을 지었다며 황제가 '솔로몬이여 우리가 당신을 이겼노라'고 감격한 건축물이다. 화재를 피하고자 제국 곳곳의 신전 기둥이 재료가 되는 등 석재로 만들었고, 건축가 아닌 수학자에 의하여 지어져 높이 54m 직경 31m의 거대한 돔을 올렸는데, 1,50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그 무수한 터키의 지진에도 불구하고 원형을 보존하는 놀라운 기술이 발휘된 곳이다.
성상숭배금지령에 따라 성당의 초기 모자이크화가 파괴되고, 금지령이 풀린 843년 이후 다시 화려하게 부활한 모자이크화는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풀을 점령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황제의 안목으로 모자이크 성화는 파괴 대신 성화 위에 횟칠이 가해져 오히려 깊숙히 간직되었다. 이후 첨탑이 세워지는 등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어 사용되는 오랫동안 숨어있던 성화는 현대에 이르러 존재가 드러났지만 극히 일부만 횟칠을 벗기고 나머지는 여전히 이슬람 사원임을 이유로 횟칠 속에 보존되어 있다. 성화를 보존하려는 터키인의 생각이 이슬람을 핑계삼는다고 보여지지만 한편으로 신비감을 내세워 관광객을 모으고, 후손들에게도 관광자원을 남겨두려는 지혜가 아닌가 생각된다.
예레베탄 사라이! 유스티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건축된 지하저수조. 적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충분한 물의 공급을 위해 건축된 지하저수조는 이 곳 외에도 도시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고 한다.
비잔틴 제국 곳곳에서 날라온 대리석 기둥(심지어 기둥 문양으로 보아 신전에서 가져온 것들도 있어)들로 세워져, 지하궁전이라는 별칭을 얻었지만 저수조 역할이 필요없게 되면서 방치되다가 급기야 쓰레기장으로 사용되었는데 007영화 촬영장소로 이용된 후 1985년에야 관광자원으로 복원되었다.
15분 정도 걸어서 찾아 간 그랜드 바자르는 동서교역의 중심지 이스탄불의 상징이다. 비잔틴 시대부터 형성되고. 메흐멧트 2세때 두개의 아케이드가 만들어지면서 이 곳 일대에 들어선 가게들은 현재 4,400여개 상점이 업종별로 관광객을 유혹한다.
유람선에서 본 유럽쪽 이스탄불의 전경, 도시 곳곳이 첨탑과 어우러진 이런 모습이다.
항구에 정박한, 어마어마한 3척의 크루저선, 반대편 항구에도 한척이 더 있었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연결한 다리, 반대편에도 하나가 더 있고, 다리에는 인도도 만들어졌다는데, 잦은 자살로 통행은 금지되었단다.
시집가기 전에 뱀메 물려죽게 될 운명을 타고 났다는 공주를 살리고자 바다 한가운데 작은 바위위에 만들어진 집. 그러나 운명은 어쩔수 없는 것이, 시집가기 전날 신랑측에서 건네진 과일상자에 숨어든 뱀에 물려 공주는 죽고 말았다는 애잔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히포드럼의 오벨리스크 기념탑
오벨리스크에 있는 그림은 놀랍게도 상형문자가 아닌 표음문자인 것이 로제타돌에 의하여 밝혀졌다고 한다.
성 소피아 사원의 전경
다른 각도에서 본 성소피아 모습
성 소피아 사원의 내부, 엄청난 대규모의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없고, 그 때 찍은 동영상도 부족하긴 마찬가지였다.
2층에서 본 사원 내부
덧칠한 회칠을 제거한 후에 나타난 모자이크 성화
이슬람 시대의 횟칠이 벗겨지는 모습. 사원 벽면이 모두 성화로 가득찼고, 현재는 횟칠로 덮혀져 감추어져 있다.
성소피아사원의 건축과 관련된 황제들(오른쪽은 성벽을 바치는 콘스탄티누스. 왼쪽은 성소피아 성당을 바치는 유스티아니우스)과 어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상
프랑스의 젊은 학생들과 함께...
하저수조의 가장 사진이 잘 나온다는 포인트, 007영화에서 본 장면과 흡사하지 않은가.
이렇게 거꾸로 처박힌 메두사 외에 옆으로 누운 메두사도 있는데, 이 메두사 기둥들이 어디서 왔는지,그리고 왜 처박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랜드 바자르의 메인 통로, 보석상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랜드 바자르 제1문. 이런 출입구가 36개라나?